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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요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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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노우에 요시카는 사쓰마 번 출신의 일본 제국 해군 군인으로, 사쓰에이 전쟁 참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해군 소위로 재임관, 강화도 사건 당시 운요호 함장으로 조선 침략에 기여했다. 이후 해군 소장, 해군 중장, 해군 대장을 거쳐 원수까지 진급했으며, 일본 해군 사관학교 초대 교장,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러일 전쟁 이후 자작, 원수로 승진했으나, 만년에는 지멘스 사건 수습 과정에서 야마모토 곤노효에 등을 옹호했다. 1929년 간암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종1위,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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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요시카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일본 제국 해군 원수 이노우에 요시카
일본 제국 해군 원수 자작 이노우에 요시카
본명이노우에 요시카 (井上良馨)
출생1845년 11월 3일
출생지가고시마, 사쓰마 번, 일본
사망1929년 3월 22일
사망지도쿄, 일본 제국
묘소군모토 묘지
신분
작위자작
소속
군사 조직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868년–1911년
최종 계급원수 해군대장
주요 지휘 경력
지휘운요
세이키
아즈마
아사마
후소
곤고
해군병학교
연습함대
사세보 진수부
구레 진수부
요코스카 진수부
참전
주요 전투보신 전쟁
강화도 사건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훈장
훈장욱일장
금치훈장
국화장
가족 정보
배우자미츠코 (?) 이주인 (伊集院光子)
아버지시치로 이노우에 (井上七郎)
기타 정보
관련 인물사이고 주도

2. 생애

현재 가고시마시의 일부가 된 곳에서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 가문의 가신 아들로 태어난 이노우에는 젊은 시절 사쓰에이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전투 중 파편탄에 의해 왼쪽 허벅지에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영국 해군의 화력과 몇 척의 함선이 가고시마에 가한 물질적 피해 규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회복 후 그는 사쓰마 해군에 입대하여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보신 전쟁과 관련된 주요 해상 전투에 사쓰마 군함 가스가/春日일본어의 지휘관으로 모두 참여했다.[3]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봉건 해군이 중앙 정부 통제에 흡수되면서 이노우에는 신생 일본 제국 해군의 소위로 재입대하여 류조/龍驤일본어에 복무했으며, 1872년까지 집행관의 직위로 승진했고, 1874년에는 다시 ''가스가''의 함장으로 복귀했다.

이노우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정한론에 대한 지지자였다. 강화도 조약 (1875년) 당시 이노우에는 포격선 운요/雲揚일본어의 함장이었으며, 이는 한국의 외국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 개설로 이어진 사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이노우에는 새로운 코르벳 세이키/清輝일본어에 배속되어 건조를 감독하는 최고 장비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세이키''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자체 생산된 군함이었다.

사이고에 대한 존경심과 ''세이키''와 함께 탈주할지도 모른다는 일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노우에는 사쓰마 반란 동안 자신의 옛 사쓰마 동족에 대항하여 메이지 정부에 충성을 유지했다. 1877년 10월, 이노우에는 ''세이키''를 유럽으로 항해하도록 배정받았다. ''세이키''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콘스탄티노플에 기항했으며, 이노우에는 오스만 술탄의 알현을 받았고, 결국 런던에 도착했다. 이 항해는 해외 언론에서 일본의 주요 업적으로 칭송받았다.

일본으로 돌아온 이노우에는 일본 해군에서 아즈마, 아사마/浅間일본어, 후소/扶桑일본어 및 곤고/金剛일본어를 포함한 다양한 함선의 함장을 역임했다.

이노우에는 1882년 6월 해군 중령으로, 1886년 6월 15일에는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그 직후 해군성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887년 5월 24일 ''가족'' 귀족 제도를 통해 ''단샤쿠'' (남작)의 귀족 칭호를 받았다.

원수 해군 남작 이노우에 요시카, 1900


이노우에는 1888년 8월 16일 일본 제국 해군 사관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1889년 7월 29일 예비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1892년 12월 12일에는 해군 중장이자 사세보 진수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예비 병력을 계속 지휘했기 때문에 1895년의 청일 전쟁 동안에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1896년 2월 26일부터 1900년 5월 20일까지 구레 진수부의 사령관을 역임했다. 1900년 11월, 그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다. 이노우에는 1901년 5월 20일부터 1905년 1월 14일까지 요코스카 진수부의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1901년 12월 12일 해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1905년 11월, 그는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

원수 해군 남작 이노우에 요시카


러일 전쟁 이후 이노우에는 1907년 9월 21일 ''시샤쿠'' (자작)으로, 1911년 10월 31일 퇴임 시에는 원수로 승격되었다. 퇴임 후에도 이노우에는 해군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캐롤라인 제도의 점령과 합병을 강력하게 옹호했다.[4]

이노우에는 1929년에 사망했다. 그의 묘는 그의 고향인 가고시마에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메이지 7년(1874년) 10월, 이노우에 요시카는 '운요'의 함장으로 부임했다. 조선에 대한 외압을 추진하던 일본 정부는 다음 해인 1875년 5월에 '운요'와 '제2 정묘'를 조선에 파견했다. 정한론을 지지했던 이노우에는 부산에 들어가 시위 포격 훈련과 무단 측량 등 도발적인 행동을 반복하며 조선 서해안으로 진출했다.[3]

9월 15일, 강화도 포대는 이노우에의 도발에 결국 반격했고, '운요'는 이에 응전하여 포대를 함락시켰다. 이것이 바로 강화도 사건이다.[3] 포대를 함락시킨 이노우에는 즉시 '운요'를 일본으로 귀국시켜, 나가사키에서 가와무라 스미요시 중장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3]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결국 조일수호조규 체결로 이어졌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개항시키고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더욱 취약해졌다.

강화도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한국인들에게 큰 반감과 분노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한국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의 주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2. 1. 1. 강화도 사건

메이지 7년(1874년) 10월, 이노우에 요시카는 '운요'의 함장으로 부임했다. 조선에 대한 외압을 추진하던 일본 정부는 다음 해인 1875년 5월에 '운요'와 '제2 정묘'를 조선에 파견했다. 정한론을 지지했던 이노우에는 부산에 들어가 시위 포격 훈련과 무단 측량 등 도발적인 행동을 반복하며 조선 서해안으로 진출했다.

9월 15일, 강화도 포대는 이노우에의 도발에 결국 반격했고, '운요'는 이에 응전하여 포대를 함락시켰다. 이것이 바로 강화도 사건이다. 포대를 함락시킨 이노우에는 즉시 '운요'를 일본으로 귀국시켜, 나가사키에서 가와무라 스미요시 중장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결국 조일수호조규 체결로 이어졌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개항시키고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더욱 취약해졌다.

강화도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한국인들에게 큰 반감과 분노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한국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의 주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2. 2. 세이키 함장과 유럽 항해

2. 3. 해군 고위 장교 시절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봉건 해군이 중앙 정부 통제에 흡수되면서 이노우에는 신생 일본 제국 해군의 소위로 재입대하여 Ryūjō영어에 복무했으며, 1872년까지 집행관의 직위로 승진했고, 1874년에는 다시 ''가스가''의 함장으로 복귀했다.

이노우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세이칸론에 대한 지지자였다. 강화도 조약 (1875년) 당시 이노우에는 포격선 운요/雲揚 (砲艦)일본어의 함장이었으며, 이는 한국의 외국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 개설로 이어진 사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이노우에는 새로운 코르벳 세이키/清輝 (コルベット)일본어에 배속되어 건조를 감독하는 최고 장비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세이키''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자체 생산된 군함이었다.

사이고에 대한 존경심과 ''세이키''와 함께 탈주할지도 모른다는 일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노우에는 사쓰마 반란 동안 자신의 옛 사쓰마 동족에 대항하여 메이지 정부에 충성을 유지했다. 1877년 10월, 이노우에는 ''세이키''를 유럽으로 항해하도록 배정받았다. ''세이키''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콘스탄티노플에 기항했으며, 이노우에는 오스만 술탄의 알현을 받았고, 결국 런던에 도착했다. 이 항해는 해외 언론에서 일본의 주요 업적으로 칭송받았다.

일본으로 돌아온 이노우에는 일본 해군에서 아즈마, 아사마/浅間 (コルベット)일본어, 후소/扶桑 (甲鉄艦)일본어 및 곤고/金剛 (コルベット)일본어를 포함한 다양한 함선의 함장을 역임했다.

1878년 9월 24일 새벽,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결하면서 7개월간의 내란이 끝났다. 마침내 평화를 되찾은 1878년 1월, 이노우에는 "세이키"와 함께 유럽으로 출항했다. 서남 전쟁이 발발하여 실시하지 못하고 연기되었던 "세이키"의 테스트 항해를 실시하기 위해서였다. "세이키"는 일본이 처음으로 제조한 군함이었으며, 이노우에는 건조 중부터 함장으로 임명되어 장비 및 선체의 검사를 담당했다. 이노우에의 지휘 아래 "세이키"는 3개월 만에 일본과 유럽을 무사히 왕복하며, 국산 함선으로도 충분한 항해 성능을 갖추고 있음을 실증했다.

1879년에 고생을 함께한 "세이키"에서 내려, 도 · 아사마 · 후소의 각 함장을 역임했다. "후소" 함장 취임 직전인 1882년 6월에 대좌로 승진했다. 1884년 2월부터 10개월간, 처음으로 육상 근무가 되는 해군성 군사부 차장을 맡았다.

이노우에는 1882년 6월 해군 중령으로, 1886년 6월 15일에는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그 직후 해군성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887년 5월 24일 ''가족'' 귀족 제도를 통해 ''단샤쿠'' (남작)의 귀족 칭호를 받았다.

이노우에는 1888년 8월 16일 일본 제국 해군 사관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1889년 7월 29일 예비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1892년 12월 12일에는 해군 중장이자 사세보 진수부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토는 함장에서 그대로 함대 사령관으로 전장에서 괄목할 만한 활약을 이어갔고, 이노우에는 해군성의 모든 실무를 장악하여 실행을 명령하는 군정관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모두 1892년 12월 12일에 중장으로 승진[28]했지만, 1887년 5월 24일에 남작으로 서훈된[29] 이노우에가 정부 내에서는 더 높게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토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노우에보다 높은 자작으로 서훈된데다, 이노우에보다 3년 먼저 대장으로 승진했다. 군정의 중추인 군무국장, 군령의 정점인 참모본부 해군부장을 역임한 이노우에의 공적은 결코 낮지 않지만, 아무래도 이토의 활약이 눈에 띄고, 이노우에의 활약은 두드러지지 않게 되었다. 6년에 걸친 소장 시대 전반을 이토는 상비 소함대 사령관, 이노우에는 군무국장으로 보냈고, 후반에는 서로의 보직을 교환했다.

그는 예비 병력을 계속 지휘했기 때문에 1895년의 청일 전쟁 동안에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1896년 2월 26일부터 1900년 5월 20일까지 구레 진수부의 사령관을 역임했다.

중장 시대, 이노우에는 사세보 · 요코스카 양 진수부 사령 장관을 역임했고, 청일 전쟁이 종결된 1895년 2월에 서해 함대 사령 장관으로 전임했다. 그러나 실제로 일전을 치르지 않고, 가을에 상비 함대 사령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서해 · 상비 양 함대를 합쳐 1년간 마지막 해상 근무를 만끽하고 구레 진수부 사령 장관이 되었다. 이로써 이노우에는 요코스카 · 구레 · 사세보의 3개 진수부의 모든 장관을 역임하게 되었다. 구레 진수부 장관 역시 4년에 걸친 장기 집권이었다.

1900년 11월, 그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다. 이노우에는 1901년 5월 20일부터 1905년 1월 14일까지 요코스카 진수부의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1901년 12월 12일 해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1900년 5월, 마지막 임무로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 장관에 취임했다. 이 보직 역시 러일 전쟁 종결인 1905년 12월까지 5년 반에 달하는 장기 집권이었다. 이노우에는 두 번 다시 외전에 나가지 않았지만, 재임 중에 무로란 진수부 설치안이 철회되었다. 대신 오미나토 요항부를 설치하기 위한 사무 처리에 종사했다. 또한 러일 전쟁에서도 쓰가루 해협의 방위 · 감시를 진수부 · 요항부가 담당했기 때문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통상 파괴 대책 및 임검 작업에 시달렸다. 이 보직을 맡고 있던 1901년 12월, 이노우에 역시 해군 대장으로 승진했다.

1905년 11월, 그는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

러일 전쟁 이후 이노우에는 1907년 9월 21일 ''시샤쿠'' (자작)으로, 1911년 10월 31일 퇴임 시에는 원수로 승격되었다. 퇴임 후에도 이노우에는 해군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캐롤라인 제도의 점령과 합병을 강력하게 옹호했다.[4]

2. 3. 1. 러일 전쟁 이후

왼쪽부터: 이노우에 요시카, 도고 헤이하치로, 오카다 게이스케 (1920년대)


러일 전쟁 이후 이노우에는 현장에서 물러나 군사 참의관이 되었다. 메이지 40년(1907년)에 자작, 메이지 44년(1911년)에 원수 계급을 받았다. 그러나 오쿠 야스카타 육군 대장의 공적과 비교되어 "오쿠 대장의 덤으로 원수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0] 이노우에는 이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비판은 현재까지도 이노우에의 업적을 과소평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만년의 도고 헤이하치로처럼 원수 지위를 남용하지는 않았지만, 지멘스 사건 수습 과정에서 야마모토 곤노효에 등을 옹호하며 가혹한 징벌 인사를 간언하기도 했다.

1926년 다이쇼 천황 임종 시, 도고, 오쿠와 함께 하야마 어용저에 머물렀다[31]。 쇼와 4년(1929년) 3월 22일 간암으로 85세에 사망했으며, 유골은 고리모토 묘지에 매장되었다. 사후 종1위·대훈위에 서임되었다.

이노우에는 자신의 작위를 1대에 한정할 것을 유언했지만, 아들 토라는 이를 어기고 작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요시카의 원수도 매각 등 문제로 인해 결국 작위는 반환되었다.

2. 4. 퇴역 이후

러일 전쟁 이후 이노우에는 현장을 떠나 군사 참의관으로 물러났다.[4] 막부 말기부터 러일 전쟁까지 발자취를 남긴 이노우에에게는 1907년에 자작, 1911년에 원수 칭호가 주어졌다.[4] 원수 칭호에 대해서는, 동시에 서임된 오쿠 야스카타 육군 대장과의 공적 비교, 또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육군 대장의 추천 배경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도 있었다.[4] 그러나 이노우에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일절 변명하지 않았다.

만년의 이노우에는 지멘스 사건 수습 과정에서 야마모토 곤노효에 이하 간부들을 추방한 야시로 로쿠로 해군의 가혹한 징벌 인사에 대해 간언한 것 외에는, 현역 장교를 농락하는 일은 없었다.[4]

1926년 12월, 다이쇼 천황이 위독했을 때, 이노우에는 도고, 오쿠 양 원수와 함께 하야마 어용저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었다.[30] 1929년 3월 22일, 간암으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31] 사후 종1위·대훈위에 서임되었다. 유골은 고향 가고시마(가고시마현)의 고리모토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노우에는 자신의 자작위를 1대에 한정할 것을 유언했지만, 아들 토라는 이를 뒤엎고 습작 수속을 했다. 그러나 요시카의 원수도 매각 등 문제를 일으켜 결국 작위 반환에 내몰렸다.

3. 훈장 및 작위

이노우에 요시카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다양한 훈장과 작위를 받았다. 위계는 1873년 종6위를 시작으로[5] 순차적으로 승진하여 1929년에는 종1위에 이르렀다.[13]

훈장으로는 1885년 욱일대수장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14] 1889년에는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을,[15] 1893년에는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43] 1895년에는 메이지 27·28년 종군기장과[44] 욱일중광장을 받았다.[45] 1900년에는 훈1등 서보장을,[46] 1905년에는 다시 욱일대수장을 받았다.[47] 1906년에는 공2급 금치훈장과 메이지 37·38년 종군기장을 받았다.[48]

1907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49] 1911년에는 원수 칭호를 받았다.[50] 1915년에는 금배 1조와 다이쇼 3·4년 종군기장을,[51]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52] 1920년에는 욱일동화대수장과 다이쇼 3년 내지 9년 전역 종군기장을 받았다.[53] 1929년에는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40]

4. 가족

아내는 이주인 켄젠의 딸인 미츠코이다.[54] 장남은 요시오, 차남은 토라이다. 장녀 히데코는 마츠모토 켄지로의 부인이며,[54] 차녀 키요코는 니시오 유지로의 부인이다.[54]

5. 평가

5. 1. 비판적 시각

참조

[1] 서적 Imperial Japanese Navy
[2] 웹사이트 井上家(海軍大将・井上良馨の子孫・家系図) https://keibatsugaku[...] 2020-09-23
[3] 서적 Britain and Japan: Biographical Portraits, Vol. III
[4] 서적 Making waves: politics, propaganda, and the emergence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5] 웹사이트 甲1番大日記 式部寮達 赤塚真成外15名叙位の件 - Reference Code: 'C09111306600' https://www.jacar.ar[...]
[6] 간행물 『太政官日誌』明治9年1月-6月
[7] 간행물 『官報』第1003号「叙任及辞令」1886年11月1日。
[8] 간행물 『官報』第2584号「叙任及辞令」1892年2月15日。
[9] 간행물 『官報』第4570号「叙任及辞令」1898年9月21日。
[10] 간행물 『官報』第5548号「叙任及辞令」1901年12月28日。
[11] 간행물 『官報』第7076号「叙任及辞令」1907年2月2日。
[12] 간행물 『官報』第468号「叙任及辞令」1914年2月21日。
[13] 간행물 『官報』第668号「叙任及辞令」1929年3月25日。
[14] 간행물 『官報』第731号「賞勲叙任」1885年12月7日。
[15] 간행물 『官報』第1929号「叙任及辞令」1889年12月2日。
[16] 간행물 『官報』第3131号「叙任及辞令」1893年12月5日。
[17] 간행물 『官報』第3838号・付録「辞令」1896年4月18日。
[18] 간행물 『官報』第3723号「叙任及辞令」1895年11月25日。
[19] 간행물 『官報』第5226号「叙任及辞令」1900年12月1日。
[20] 간행물 『官報』第6727号「叙任及辞令」1905年12月1日。
[21]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1907年1月28日。
[22] 간행물 『官報』第7272号「授爵叙任及辞令」1907年9月23日。
[23] 간행물 『官報』第1187号「叙任及辞令」1916年7月15日。
[24] 간행물 『官報』第1310号・付録「辞令」1916年12月13日。
[25] 간행물 『官報』第2612号「叙任及辞令」1921年4月19日。
[26] 웹사이트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井上良馨」 https://kotobank.jp/[...]
[27] 뉴스 明治の偉人の誕生地、どっちが本当? 海軍元帥・井上良馨の記念碑が二つ…調べてみると大久保利通の碑も 鹿児島市 https://373news.com/[...] 南日本新聞 2022-04-23
[28] 간행물 『官報』第2839号「叙任及辞令」1892年12月13日。
[29] 간행물 『官報』第1169号、明治20年5月25日。
[30] 뉴스 ご臨終の場に三元帥 『大阪毎日新聞』 1926-12-26
[31]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2010
[32] 웹사이트 甲1番大日記 式部寮達 赤塚真成外15名叙位の件
[33] 간행물 『太政官日誌』明治9年1月-6月
[34] 간행물 『官報』第1003号「叙任及辞令」1886年11月1日。
[35] 간행물 『官報』第2584号「叙任及辞令」1892年2月15日。
[36] 간행물 官報 第4570号「叙任及辞令」 1898-09-21
[37] 간행물 官報 第5548号「叙任及辞令」 1901-12-28
[38] 간행물 官報 第7076号「叙任及辞令」 1907-02-02
[39] 간행물 官報 第468号「叙任及辞令」 1914-02-21
[40] 간행물 官報 第668号「叙任及辞令」 1929-03-25
[41] 간행물 官報 第731号「賞勲叙任」 1885-12-07
[42] 간행물 官報 第1929号「叙任及辞令」 1889-12-02
[43] 간행물 官報 第3131号「叙任及辞令」 1893-12-05
[44] 간행물 官報 第3838号・付録「辞令」 1896-04-18
[45] 간행물 官報 第3723号「叙任及辞令」 1895-11-25
[46] 간행물 官報 第5226号「叙任及辞令」 1900-12-01
[47] 간행물 官報 第6727号「叙任及辞令」 1905-12-01
[48] 간행물 官報 号外「叙任及辞令」 1907-01-28
[49] 간행물 官報 第7272号「授爵叙任及辞令」 1907-09-23
[50] 간행물 官報 第8511号「叙任及辞令」 1911-11-01
[51] 간행물 官報 第1187号「叙任及辞令」 1916-07-15
[52] 간행물 官報 第1310号・付録「辞令」 1916-12-13
[53] 간행물 官報 第2612号「叙任及辞令」 1921-04-19
[54] 웹사이트 井上家(海軍大将・井上良馨の子孫・家系図) https://keibatsugaku[...]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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